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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했던 ‘북두팔성’도 그렇게 탄생한 셈이죠. 여기서 드러난 그의 작품관을 토대로 박이소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중심보다는 주변에 시선을 두는데요. 모두가 주목하고 또 자신 또한 편승하길 원하는 특정 지점에서 각도를 살짝 튼 주변을 조명하는 거지요. 그런 채로 아주 오래 머물러주어요. 그리고 아주 열렬히 응원해 줍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에요. ‘박이소가 바라보는 곳은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로 밀려나고 소외된 세상이다. (중략) 작고 사소한 존재들에 대한 박이소의 관심은 다정한 배려와 애정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작고 연약한 것들이 전체를 울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먹으로 풀을 그리고 ‘그냥 풀’이라고 쓴 작업에서는 한낱 풀이 주인공이 된다. <잡초도 자란다>에서는 잡초가 거센 바람을 견디고 크게 자라기 바라는 작가의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이 자라서 중심의 질서를 흔들기 원하는 작가의 기대가 담겨 있다.’
또 다른 작품에선 조금이라도 움츠러들었을 존재들의 미래를 밝혀주기도 합니다. ‘박이소는 2001년 대안공간 풀에서 열렸던 공사장에서나 쓰는 투박한 실외 조명기들을 각목에 얼기설기 덧대어 전시장 한쪽 구석을 눈부시게 비추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의 제목을 확인하던 순간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전시장 한 켠에 작게 쓰여 있던 제목은 자그마치 ’당신의 밝은 미래‘였다. 연약한 시각적 구성으로 표현된, 허름하고, 흔하여, 낮고, 구석진 곳들에 대한 작가의 배려가 고맙고 울컥했다, (중략) 박이소는 강하고 크며, 화려한 중심이 아닌, 연약하고 작으며, 소소한 주변으로서의 우리를 노래한다. 그리고 그 주변이 스스로의 언어로 나름의 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속삭이는 듯하다. 따뜻하고, 정직하고, 다정하게 살면 된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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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따스할 수가요. 세상이 집중 조명하는 정중앙이 아닌, 그렇지 못한 주변 곳곳을 샅샅이 살펴준다니, 그로 인한 포만감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저자의 어깨너머로 그의 작품들을 접하다 보면 미묘한 감정들이 몽글몽글 차오르더군요. 늘 멀게만 느껴지는 목표지점, 그 언저리에라도 닿고 싶어 필사적으로 애쓰는 제가 연상되었던 탓이었어요. 멈추지 않고 아등바등하는 것이 당연히 고마웠지만, 한편으로 안쓰럽기도 했고, 조금 우스워 보이기도 했는데요. 작가가 주변을 조명하는 것만큼도, 현재 지점의 저를 살펴주지 못했단 생각에 낯이 뜨거워졌습니다. 목표지점만 뚫어져라 응시하느라 주변은 전혀 살피지 못한다는 것도 어쩐지 부끄러워졌고요.
그의 작품들을 접하며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닿고자 하는 지점과 나를 잇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나와 나를 잇는 일임을요. 쫓고자 하는 것에 도취되어 첫발을 디뎠을 때의 순수한 의도를 잃지 않아야 함을요. 또한 중심의 위계에 주눅 들지 않을 것, 그리고 그쪽으로만 편중된 시선을 두지 않을 것도요.
모두의 관심이 쏠리는 한 지점만을 조명하기에 세상은 넓고, 우리의 삶도 깁니다. 목표지점이 어디에 있든 중심축이 되어야 하는 건, 우리 각자가 서 있는 지점이어야겠지요. 우리는 더욱 도약하기를 꿈꾸며 오늘도 발을 구르지만, 당장의 위치를 경시할 일은 아닙니다. 저마다의 걸음새와 그 박자가 다를 뿐입니다.
빛을 보게 될 순서가 중요한가요? 지금 열렬히 반짝이고 있단 사실이, 그리고 앞으로 더 빛나게 되리란 희망이 전부일 테죠. 그것이 우리를 멈추지 않고 움직이게 합니다. |